1. 개요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은 고대 신바빌로니아 제국(바빌론 제10왕조)의 수도 바빌론에 존재했던 거대한 옥상 정원 단지를 말한다.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꼽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단순히 옥상에 조성한 정원이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당대의 건축 기술로 고층 건물에 물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려 수목이 가득한 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높은 곳에 조성된 정원은 여러 신화에서 신이 다스리는 낙원의 이미지와도 닿아 있었으며, 고대인들은 당시로서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했던 것이 지상에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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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정원 상상도 |
2. 역사
1세기 히브리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정원을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아미티스는 메디아 출신의 공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긴 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었다고 전해진다. 아미티스는 산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고향과는 다른 평야 한가운데 위치한 바빌론의 삶에 지쳐 향수병을 앓았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를 위해 아내의 고향을 닮은 정원을 건설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가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다.
기원전 612년, 신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메디아 제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미티스와 혼인했다. 메디아 제국과 혼인 동맹을 성사시킨 것인데 이 동맹의 힘 덕에 이후 기원전 610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연합군은 아시리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일각에서는 메디아 연합을 통해 얻어낸 승리를 기념하고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겸사겸사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3. 건축물의 구조
정원의 길이는 각 방향으로 123m이다.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지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극장을 연상시킨다.
기원전 40년에 작성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총 7층으로 꼭대기 층은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 20m가 더 높았다고 되어 있다. 맨 밑층부터 꼭대기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고, 각 층에는 테라스가 위치해 있었으며, 테라스에는 흙을 덮은 다음 온갖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한다. 각 테라스는 돌기둥으로 된 통로로 이어져 있었으며, 공중 정원 내부에는 방 100여 개가 있고 내부 한가운데에는 크기가 엄청난 광장이 있었으며, 이 광장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방수를 위해 두꺼운 납판 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두꺼운 갈대를 놓고 그 위에 다시 구운 벽돌과 석회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한 기록에 의하면, “공중 정원은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 포도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린 석류나무는 잔잔한 미풍에 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었으며 폭포수에서 튀는 물방울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4. 위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학계에서는 바그다드 교외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가 바빌론 왕궁 유적을 발굴하면서 찾았던 것이 바빌론과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었다. 당시 그는 바빌론 시의 북동쪽에 있는 남쪽 왕궁 인근에서 지하에 건설된 14개의 아치형 방을 발견했고, 이를 공중 정원에서 물을 퍼내는 지하 시설이라고 생각했다. 벽돌에는 방수를 위한 역청이 발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초기에는 설득력을 얻었지만, 발굴 결과 현재는 식량 저장소나 감옥으로 추정한다.
이후 발굴 결과 등을 토대로 학자들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 많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강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공중 정원이 정확히 없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서기 1세기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도 있다. 그 근거는 공중정원에 대한 기록이 다른 국가의 기록에만 나타나고 바빌론 당대의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점토판에는 전혀 공중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타국가의 기록도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와 고대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는 기록이 전무하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경우는 그리스 측의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결정적으로 발굴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이 되었으며 당시 점토판에서도 바벨탑의 존재 자체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바벨탑과 달리 당대 바빌론인들이 남긴 기록이 없다는 것에서 바빌론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 등장했던 소재가 와전되어 실존한 것처럼 여겨진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5. 물을 어떻게 끌어올렸나?
공중전원이 건설된 천수백년 후에 건설된 베르사유 궁도 수원에서 꽤 높은 곳에 지어져 있어서 물을 끌어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8km 떨어진 수원지에서 수차 1,400여 개를 동원하여 600m 위 언덕으로 물을 끌어올린 후 수로를 통해 공급하는 방식. 공중 정원도 베르사유 궁전처럼 당시의 백성들을 쥐어짜 사치를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맨 꼭대기 층에 위에서 아래로 난 구멍들이 있으며 여러 도구들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그리스 역사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스트라보가 남긴 글에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했다는 나선 펌프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