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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엔딩코디네이터

플랜 75

신형범 기자 입력 2024.02.16 20:00 수정 2024.02.25 08:28

남자는 23살에 대학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아이 셋을 낳고 70년을 함께 살았는데 마지막 5년은 함께 살았다기보다는 그냥 '버틴' 시간에 가까웠다. 2019년 남자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거동이 어려워지고 신체기능도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아내도 노환에 따른 지병이 깊어졌다. 두 사람은 고향집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함께 삶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9일 동반 안락사로 세상을 떠난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이야기다. 이게 가능한 건 네덜란드가 적극적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로 2002년 '적극적 안락사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안락사는 문턱이 점점 낮아져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으로 견디기 힘든 사람, 미성년자까지도 안락사가 가능해졌다.

 

지난 주말,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영화 《플랜75》를 인상 깊게 봤다. 영화는 한 청년의 노인 혐오 범죄로 시작한다. 청년은 노인들이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고 그 피해를 젊은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 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다.

 

청년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판단한 일본정부는 75세가 되면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플랜75’라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75세 이상 노인의 ‘선택권’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법안이다. 주인공 미치는 호텔 청소를 하면서 혼자 살아가는 78세 여성이다.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의 도움은 물론 국가의 지원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생활보호를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에서 정리해고된 후 일자리를 찾아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미치는 ‘플랜75’를 신청한다. 

 

현재 안락사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 일부 주가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 불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다가 점차 확대되어 지금은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성인은 물론 조건을 갖춘 미성년자의 선택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나는 안락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 어떤 경우엔 가장 합리적인 선택할 수도 있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사고나 질병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도 일종의 행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플랜75》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초고령사회에선 고령자에 대한 개인과 국가의 부담이 커지면서 사회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플랜75’는 이제 어느 나라에서건 상상이 가능한, 곧 나올법한 제도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플랜75’를 선택하는 이들은 결국 하층민이 대부분이다. 

 

 
일이 없고 벌이가 없고 인생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 죽음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서히 밀려나는 이들에게 선택이란 때론 사치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진짜로 ‘플랜75’ 같은 제도가 만들어진다면, 타의로 내몰리는 노인도 다수 생길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더 이상 사회로부터 생존을 보호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죽음은 약자들에게 강요된 사회적 타살과 다름없다.

 

국가로서는 노인이 줄어드는 게 이익이다.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노인에 대한 기초생활보장은 필요하다. 100세 시대라면 이들을 위해 30~40년을 지원해야 한다. '플랜75' 같은 제도로 약간의 위로금과 안락사 시스템으로 대체한다면 국가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득이 될 것이다. 

 

‘플랜75’는 결국 노인은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고의 결과물이다. 다음 세대가 조금 더 풍요롭기 위해, 오로지 생산성만을 따져 노인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유의지에 의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여전히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모두 생명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신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거두어갈 수 없다는 것과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인간답게 스스로 죽는 것도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는 양쪽의 입장 모두 근거가 있다. 당연히 정답은 없고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문제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치는 석양을 보면서 옆으로 고요하게 퇴장한다. 붉게 물든 석양만이 화면을 채우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까지 고민하지 않았던 유형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지키는 게 옳은지, 개인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국가가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은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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