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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홈페이지 담당자 기자 입력 2022.09.07 15:34 수정 2022.09.07 15:34

우리의 도시와 건축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도시와 건축이 가치있는 생활과 문명을 이루게 하지만 역으로 아름다운 문화가 있어야 아름다운 건축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과 역사만한 것이 세상에 많지 않다. 이제 우리의 도시와 건축에 우리 문명의 아름다움을 만들어야 할 때다.

오늘의 우리 문화는 인간 자체에 몰두해서 그런지 인간공동체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공동체에 대해 논의한다 해도 대부분 정치적 관심일 뿐 인간집합의 공간형식인 건축과 도시에 대한 것은 거의 없다. 인간은 건축과 도시 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데도 건축과 도시는 지식인들의 관심 밖이다. 500만 도시인 강북의 문화 인프라는 조선시대의 역사공간 이외에는 별것이 없고 30년 만에 이루어진 또다른 500만의 도시 강남의 수많은 건축물은 단지 필요와 유행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우리 모두의 것인 도시와 건축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가운데 도시의 공유공간인 역사공간과 문화공간과 자연은 반도시적 건축과 자동차의 행렬에 의해 부서져가고 있다. 나의 '세계건축기행'은 그러한 우리의 도시와 건축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피라미드]

미라의 영원한 삶의 공간은 마스타바(Mastaba)와 피라미드 그리고 석굴분묘(Temple)의 세 형태가 있다. 마스타바는 단이 진 직사각형 구조물로, 수직통로를 통해 외부와 연결되는 지하묘실 위에 세워졌다. 마스타바의 단순한 입체형태는 이집트인의 영원함과 안전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데, 그 이면에는 존재와 삶을 영원히 이어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현재를 만든 자와 허무의 심연으로 현재를 부순 자의 반복되는 전쟁의 기록이다. 전쟁이 얼마나 많은 생명과 문명을 무의미하게 없앴는가. 서로가 서로를 죽일 뿐 아니라 역사를 부수고 기억을 지운다. 또 역사를 세운다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역사가 사라져갔는가. 영원의 도시에서 모든 것을 박탈당한 기자의 피라미드군은 마치 미라로 남은 파라오 같다.

평생을 계속한 죽음의 의식을 통하여 영원한 현재로 남으려 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피라미드는 삶과 하나인 영원한 죽음의 시간을 말하는 그들의 상형문자다.
태어남에 울지 않았듯이 죽음에 울지 않아야 한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한순간 실재였던 것과의 헤어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인류 역사에서 실재하는 생명체의 다른 한 부분으로 다시 존재하는 거이 아닐까.



[까따꼼베] #카타콤베

지하의 세계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이미 영혼은 저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 엄청나고 무의미한 시신의 세계는 무엇인가. 미라에게는 영원의 공간이 필요하였지만 죽음으로 영혼이 떠난 육체들을 위한 이 한없는 공간은 무엇인가. 산자는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공간은 죽은 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의 분신인 산 사람이 죽은 자의 육체를 위해 만드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죽음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산 자들은 계속 죽음의 공간을 만든다.


[떼오띠우아깐] #테오티우아칸

누구나 멕시코시티에 오면 그 도시보다 8세기에 사라진 옛 도시 테오티우아칸을 먼저 찾는다. 도심을 벗어나서 변두리를 지나 45분간 달리면 나오는 곳. 도심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으나 변두리에는 도처에 가난이 보인다. 오래된 문명국가의 가난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사람들이 1000년 넘게 여기서 살아왔는데 아직 이렇게 폐허에 머물러 있다.

[싼 까딸도 묘지] #산카탈도
산 자의 공간만큼 죽은 자의 공간에 대해서도 준비하여야 한다. 죽음의 공간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산 자의 것이다. 산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전 국토로 한도 없이 뻗어가는 묘지를 이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화장과 매장의 양자택일을 말할 것이 아니라 죽음의 형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산 까딸도 묘지는 내게 알도 로씨라는 건축가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죽은 자의 공동체, 죽음의 형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로마에서 여기까지 여섯 시간 동안 달려온 보람이 있따. 건축가는 삶과 죽음의 공동체 모두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위대한 건축은 삶과 죽음의 형식 모두를 말한다.

[이세 신궁]

일본의 종교건축으로는 불사와 신사가 있는데, 불사는 불교의 사원이고 신사는 일본 토속 종교의 사원이다. 이세 지역의 신궁은 일본의 신성함과 국가의 단일성을 과시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경 계획되었다. 이세 신궁은 신사건축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정통형식으로 신메이 즈꾸리(신사 건축 양식의 하나)의 대표적 건물이다. 신궁은 천황가족의 조상신을 모시는 내궁과 식물, 산업의 수호신을 모시는 외궁으로 구성된다.

완벽한 조화이며 완전한 인공의 세계다. 일본 혼의 단면을 잠시 본 듯하다. 무엇보다 마음을 열고 일본을 공부하는 계기가 될 만큼 이세 신궁은 대단하였다.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게 한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역사상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이렇게 2000년 동안이나 괴롭히기만 한 예가 없다. 문무대왕의 유언을 읽으면 임진왜란 같은 일본의 야욕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배웠으나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우지 못하였다. 배울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자가 결국 더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묘 교회]


지하공간은 성묘 교회의 상징형식과 공간형식을 지하의 자연 질서와 연결하고 있다. 지상의 교회와 지하의 무덤이 아름답게 조화되고, 돌로 쌓아 만든 공간과 돌을 파고 만든 공간이 한 내부공간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변형이 건축공간이 된, 많은 연구가 필요한 건축공간이다. 건축은 역사적 사건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성묘 교회에는 역사적 사건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있다. 큰 욕심은 큰 절제를 요구한다. 역사적 사건의 장소를 파고파낸 돌로 집을 짓는, 자연의 변형을 통해 신성한 의미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성묘 교회 속에서 자연과 친화하는 2세기 건축의 지혜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성묘 교회를 다시 찾는다. 무엇이 세계 도처의 사람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는가. 그들은 위대한 건축을 찾아 여기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이곳이 골고타 언덕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건축은 위대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한다. 롱샹과 구겐하임이 순례자의 공간, 2세기 미술 형식의 3차원 공간인 것처럼 성모 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큰 사건을 담는 역사적 공간이다.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온통 붉은 십자가다. 우리의 교회는 도시에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도시 예루살렘에도 이렇듯 많은 교회가 도시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다. 종교공간은 도시의 심장일지라도 도시와 자연스러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묘 교회는 예루살렘이 그의 공간을 부수고 이교도의 사원이 침범해 와도 자기 고유의 공간을 스스로에게 내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아야 쏘피아] #아야소피아

과정의 공간과 목표의 공간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 것은 자신이 순례자로서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기독교 정신의 표현이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최종목표인 하늘나라로 가려 하는데, 사람들이 현세의 일에 빠져 원래의 목표를 잊는 경우가 많으므로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야 쏘피아의 중심공간인 돔은 영적인 것, 인간과 신의 공간이라는 의미와 천상의 세계라는 상징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하며 장중한 외부형태와 복잡하고 광휘(환하고 아름답게 눈이 부심. 또는 그 빛)에 찬 내부의 대조는 현세와 내세, 땅과 하늘의 대조를 나타낸다. 내부공간에서 모든 중력은 추상화되며 바깥세계의 현실은 내부의 환상적인 비현실과 대립한다.

수백년 동안 지어진 로마와 달리 꼰스딴띠노뽈리스 (#콘스탄티노플)는 단번에 만들어진 신도시다. 꼰스딴띠누스가 건설을 서둘러서 성벽, 주랑, 궁전의 주요 건물들은 불과 몇년 만에 완공되었다. 수많은 건물이 졸속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후대에 붕괴되지 않도록 보수하는 데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로마의 모든 귀족과 원로원, 기사단이 수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황제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했다. 텅 빈 옛 수도 로마는 이방인과 평민에게 방치되었다. 칙령에 의해 꼰스딴띠노뽈리스는 제2의 로마 또는 신로마로 불리었다. 로마가 만신의 도시인 데 비해 꼰스딴띠노뽈리스는 유일신의 도시였다. 도시의 공유영역과 사유영역 중 공유영역을 대표하는 정치공간, 문화공간, 체육공간에 대응하여 신의 공간인 아야 쏘피아가 신도시 꼰스딴띠노뽈리스의 상징적 위치에 자리잡았다. (...) 도시를 알아야 건축이 보인다.

 




[반석위의 돔]

이슬람교의 강령은 유대교,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비슷하나 이슬람교에서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종교의식이 없다. 모든 이슬람교 신자는 알라에게 동등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루중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 혹은 이슬람 사원에서 행해진다. 리야드에서 종종 그들의 의식에 참여했는데,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모두가 다 스스로이다. 기독교식 의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의외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슬람교에서 종교적 활동의 영역은 인간의 전체적 삶을 포괄한다. 무함마드는 모스크를 세상 가운데 장터와 함께 있게 하였다. 이슬람의 성전은 도시공동체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석 위의 돔은 이슬람교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이살름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 바씰리 사원] #성바실리성당 - 러시아 감수성이 만든 비잔띤(#비잔틴) 최고의 건축

모든 문화는 아름다움의 문화다.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는 시대나 사회는 없다. 예술형식으로서의 건축은 어떠한가. 아름다움이야말로 건축을 역사에 남게 하는 요소이다. 아름다운 건축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건축은 유기체처럼 대부분 대칭적이다. 그러나 성 바씰리 사원은 비대칭적이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정지된 순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성 바씰리 사원의 아름다움은 움직임 속에 있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절제와 단순함 소에 있다. 그러나 성 바씰리 사원은 현란한 색채와 형태의 수사학 속에 다채로운 공간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성 바씰리 사원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과 건축공간 사이의 교감에서 오는 동적 미학을 바탕으로 한 시학적 아름다움이다. 성 바씰리 사원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신과 인간, 자연과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일으킨다. 그것은 건축사의 반복을 극복한 위대한 건축미학에서 생겨나는 깨달음 같은 것이다.


[포로 로마노]

그리스인들이 유기적 통합체에서 개채적 삶을 추구하고 그에 맞는 도시를 건설한 반면, 로마인들은 집단적 삶과 기능을 우선으로 하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다른 도시국가와의 끊임없는 긴장을 감당해야 했던 그리스는 불안정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지방자치를 통치원리로 한 로마 제국은 유례없이 안정된 체제를 유지했다. 고대 로마의 도시는 하나의 통일된 도시라기보다 나름대로의 질서체계를 가지는 건물군들의 집합체였다. 각각은 기능에 적합하도록 계획되어 주변과 연계되며, 전체는 완전한 각 요소들의 집합이다.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건물군간의 경계가 좁아지게 되는데 새로운 건물군은 적절한 규모로 조정되면서 기존 구조와 맞물린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 연구하면서 포로 로마노를 건축적 관심보다 도시적 관심에서 더 깊이 들여댜보게 되었다.

로마의 위대함은 정복의 속도나 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점령지를 법에 의해 통일하고 예술적인 도시계획으로 다듬었다. 로마의 확고한 권력체제는 시대적 지혜에 의해 이룩되고 보존된 것이다.



기본적 사회단위로서 로마의 가족은 구성원간에 강력한 연대감과 책임감을 가지며 가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공동의 일에도 민감했으나 그리스의 민주적 전통과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형식이었다. 로마인들은 섬세함보다 지속적인 힘을, 아름다움보다는 육중함을, 상상보다는 사실을 중시하였다. 로마인은 감상에 적지 않는 사물의 창조자로서 현실에 뿌리내린 사람들이었고, 포로 로마노는 그런 로마인들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 도시공간이다.

[가르 다리]

사람이 다니는 길, 물류가 지나가는 길도 중요하지만 생명의 흐름인 물의 길은 도시의 기본적인 인프라다. 더 좋은 물을 먼 다른 지방에서 끌어오는 일로 해서 그 도시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도시의 기본적인 인프라인 물의 공급로를 거대한 도시구조로 만들 수 있었던 로마였으므로 아직도 대부분의 유럽 도시에 로마의 유적이 중요한 문화재로 남은 것이다.

로마의 도시가 갖는 큰 역사성은 도시가 시민을 위한, 시민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도시의 건설과 관리는 가장 뛰어난 집단에 의해 최고의 논리와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로마의 도시는 그후 모든 도시의 원형이 되었고, 가르 다리는 로마의 도시가 그리스의 도시보다 자연에 더 깊이 개입했다는 상징적 증표의 하나로 남았다.




[싼 마르꼬 광장] #산마르코광장

리알또(#리알토) 다리에는 자동차 없이 사는 도시 베네찌아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이 쌓여 있다. 바네찌아에 오면 언제나 서울이 원망스럽다. 덕수궁에서 미국문화원으로 가려면 자동차를 피해 땅속에서 땅 위로 서너번 오르내려야 하고, 플라자 호텔이서 세종문화회간으로 가려면 몇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서울에서 걷는 일은 고해(고뇌가 많은 인간 세상. 이 세상에 괴로움과 근심이 많아 그치지 아니함을 바다에 비유한 말)를 걷는 일이다. (...) 리알또 다리가 상징하는 걷는 문명의 도시를 우리의 도시들이 배워야 한다. 자동차에 점령당한 도시를 걷는 우리 시대의 천년의 다리는 어떤 것일까.

[한 알 할릴리] #칸엘칼릴리

세계 최대, 최고의 모스크인 이븐 툴룬(Ibn Tulun)과 유럽연합군인 십자군을 격퇴한 쌀라딘(Saladin)의 성채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시장인 한 알 할릴리를 카이로 한가운데 만들었다. 지난 1000년 그들은 세계의 상당부분을 지배하였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의 하나를 이룩한 것이다.



인간의 세속적 삶은 돈에 구속된다. 시장에서는 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한 알 할릴리에는 정찰이 없다. 우리는 어느 사이 사느냐 마느냐 선택 이외에 아무 대응할 일이 없는 정찰제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한 알 할라리에서는 부르면 그게 값이다. 그 값에서부터 시작한다. 싫으면 시작이 없고 마음이 있으면 바자르가 열리는 것이다.



역사를 아는 일은 인간을 아는 일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과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만든 사람과 한 알 할릴리의 상인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다. 인간 스스로가 바로 역사이다. 역사와 건축과 도시를 공부하는 일은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을 보는 일이다. 카이로에는 반만년의 시간이 현존하고 있다. 경주에 2000년의 시간이 실재하도록 하는 일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카이로에 오면 나의 생명이 과거로 연장되는 환상을 갖는다. 삶은 우주와 마주한 나의 마음 그것인데 카이로에는 아직 파라오의 배가 다니고 있다. [인간임이 같다는 건지 진짜 같은 인간이라는건지...]


© iamcody, 출처 Unsplash

[구겐하임 미술관]

역사에 새로운 것은 없으며 대부분의 예술적 창조는 기존의 변형으로부터 시작한다. 20세기 거장들의 미술품을 소장한 구겐하임 미술관에 서면 미술과 미술관과 건축에 대한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구겐하임 재단은 그 자체가 미술인 미술관을 만들려는 라이트의 독선 때문에 중간에 건축가를 바꿀 생각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라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메가리데 성]

스스로 도시이고자 한 건축으로서, 2000년 전 신도시가 하나의 건축이 되어 있는 예언적 도시 건축으로서, 역사가로의 원점공간으로서 메가리데 성은 나뽈리의 가장 중요한 장소다. 메가리데를 알고 나서 까쁘리(#카프리)의 아름다움과 쁘로치다에 남은 귀중한 옛 생활과 스빠까(#스파카) 나뽈리(#나폴리)의 개혁정신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도시를 알아야 건축을 알 수 있고 건축을 알아야 문명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xiaoxiao1999, 출처 Pixabay

[자금성]

어렵사리 처음으로 중국에 갈 기회를 얻었을 때, 중국여행을 망설였다. 우리 문화가 중국 문화의 변방일지도 모른다는 감상적 염려도 있었고 중국만은 좀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때 다녀오고 싶었다.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 많다. 특히 문자로 기록된 것은 거의가 중국에서 온 것이다. 나는 내 DNA 속에 있을 수천년에 걸친 답습의 유전인자를 두려워한 것이다. 우리의 원형이 중국에 다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중국은 중국이고 우리는 역시 우리였다.

© zoosnow, 출처 Pixabay
[끄렘린] #크렘린

건축가는 당대의 필요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속한 나라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생의 시간도 부족하다. 이것저것 참견할 시간이 없다. 일과 연관된 것이 아니면 어디에도 관여해서는 안된다.



경복궁과 끄렘린에 대한 비교 연구를 시도해보아야겠다. 끼예프(Kiev)에서 모스끄바로 천도한 시기와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가 비슷하고, 빼쩨르부르크(#페테르부르크)로의 천도와 수원성의 축조가 동일한 시기여서 흥미롭다.

21세기는 도시의 세기다. 지식인이라면 21세기의 주무대가 될 세계의 도시를 우선 넓게 알아야 한다. 싸스키아 싸센의 <글로벌 시티>를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 zeis, 출처 Unsplash

[싼도리니] #산토리니

꽃이 피는 날 다시 이리로 오겠다. 여기 이 마을에서 쓰고 그리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여기서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한 마을의 아름다움은 만드는 사람, 보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의 공동체적 협력에 의해서 성취되지만 그중에서도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건축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해 집단의 생활을 연출하고 이왕의 환경과 미래 변환에의 적응을 포함한 모든 것에 관여함으로써 물상세계 속에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비가 세차게 온다. 어제 아테네에서봤던 일본 여자들이 공항에 보인다. 젊은 여자 둘이서 이 먼 섬까지 왔다. 그들의 문화적 탐욕은 감탄스럽다. 그들은 만드는 일보다 발견하는 일, 보는 일에 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재능이 있는 자는 더 열심히 일하고 재능을 아는 자는 열심히 안목을 키운다. 문화의 꽃은 이런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출처] 137.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RC13|작성자 mi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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