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건축물 5 :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은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세워졌으며, 현재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 중이다. 537년에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허나 2020년 7월 10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었고, 현재는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The Hagia Sophia Grand Mosque)'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약 30여 년 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위대한 교회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다른 성당에 비해 훨씬 그 크기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2월 15일에 처음으로 착공되어, 제국의 황궁 바로 옆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다 완공되기 전까지는 그 옆에 있었던 아야 이레네 성당이 대신 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성당으로 쓰였다. 이후 아야 소피아가 완공된 후에는, 이 두 성당이 나뉘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아엘리아 에우도키아 황후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수도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나 그가 쫓겨나며 함께 일어난 군중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야 소피아가 완전히 불타게 된다. 이 때문에 현재는 첫 번째로 건립된 성당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아야 소피아는 소실한 지 약 11년 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 415년 10월 10일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건축가 루피누스가 지은 직경 22미터의 목조 돔이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 본체는 벽돌로, 내부 벽은 모두 대리석으로 장식됐다. 그러나 이 성당도 532년 1월 13~14일에 일어났던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와 아야 이레네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 아예 남아 내려오는 것이 없는 첫 성당과는 달리, 두 번째 성당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 내려오는 것이 존재한다.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12명의 염소가 새겨진 석재, 그리스식 기둥, 십자가가 새겨진 기둥 등 몇몇 석재들이 1935년에 서쪽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석재들은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532년 2월 23일, 두 번째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소실된 지 몇 주 정도 지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lkdldld스의 건축가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현재의 아이든)의 수학자 안테미오스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다만 안테미오스는 이 작업에 착수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성당은 가로 77미터, 세로 79미터로, 가운데에는 지름 32미터, 높이 62미터의 돔 천장이 있었고, 돔의 테두리에 있는 얇은 접시 모양 받침에는 창문 40개가 있었으며, 돔과 벽은 모자이크 성화들로 장식됐다. 돔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황후 테오도라를 사랑했던 황제는 기둥, 제단 등 수십 곳에 두 사람 이름을 함께 새겼다.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이 공출되었으며, 심지어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했다. 이때 로마나 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워낙 많은 양의 기둥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하기아 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건축을 위해 따로 다듬었는데도 서로 각각 다른 크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려 1만 명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다. 이 성당은 당대 최고의 건축학적 업적으로 여겨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나스가 축성하는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하기아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했다. 완공식을 마치고 성당에 들어간 유스티니아누스는 말했다. “솔로몬이여, 제가 당신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 탓에 내부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 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였고, 동로마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이용되어 황제의 즉위식, 결혼식과 같은 제국의 중대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곳은 절대적 성소로 치부되어, 범죄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군대라 할지라도 그를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상당수 있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있었고,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진 문,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탁자 등 많은 성유물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하기아 소피아를 포함한 모든 건물을 무자비하게 약탈했고, 이때 성당 내부에 붙어 있던 황금 모자이크, 보석, 성유물이 유럽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또한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활용됐다. 보두앵 6세는 이곳에서 1204년 5월 16일에 동로마 제국의 즉위 양식을 거의 그대로 담습하여 라틴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도록 명령한 베네치아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상부 갤러리의 동쪽 면에 무덤이 있다. 많은 관광객이 이를 실제 무덤으로 착각하는데, 진짜 무덤은 오스만 군대가 하기아 소피아를 점령한 직후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