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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현재 튀르키예의 보드룸에 있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로 서양판 진시황릉으로 불리운다.
2. 건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명실상부한 로마의 지배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에 대대적인 건축 붐을 일으켰는데, 그 첫 번째 계획으로 착수한 공사가 바로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대규모 무덤의 건설이었다. 이 건축물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세계의 평화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건립된 기념비적 사업인 터라 원로원과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건축 설계를 맡은 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해당 영묘 설계에 영감을 준 건축물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전설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묘라고 한다. 영묘가 들어선 장소는 마르스 광장 인근으로, 당시에는 '도심'으로 여겨졌던 세르비우스 성벽의 바깥에 속했는데, 이는 시내에 무덤을 쓰지 않는 당대 로마인의 관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영묘는 지름 90m, 높이 42m의 원형 대리석 건물이었으며, 크게 3층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형태였다. 영묘 외부에는 노송나무를 심어 사철 푸른색을 유지했다. 영묘의 원뿔 지붕 제일 높은 꼭대기에는 무덤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 구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총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건물 가운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자서전인 《업적록》이 적힌 청동판 등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영묘 심장부에 있는 방은 황제들 외의 안치자들의 매장실로 이용됐다. 이 매장실은 추모실을 거쳐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며, 그 위를 통해 마련된 건물 형태의 공간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임 황제들의 유골항아리가 영면해 있던 것이 재개장 전 복원 공사 중 확인됐다.
3. 안장자들
아우구스투스가 영묘를 건설한 목적이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무덤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립묘지 개념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이 묻힐 가족 공동무덤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과 다르게 77세까지 장수하였고 40년간 로마를 통치 했기 때문에 많은 가족들을 먼저 영묘에 안장해야 했다.
영묘에 가장 먼저 안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그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켈루스였다. 아들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염두에 둔 사람인데다가 젊은 나이에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어이없게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어 외손자들을 낳아준 마르쿠스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이며 양자로 2대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장인이자 그의 군사, 행정 실무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으며, 두 외손자의 친부인데다 사망 전 호민관 특권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세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 사이에서 얻어 낳은 대 드루수스다. 그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면서 조카 사위로 아그리파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 이후 차기황제로 낙점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완성한 뒤, 현직집정관 신분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원 아래 개선식을 거행하기 직전 29살의 한창 나이에 낙마사고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여러 아끼던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낸 아우구스트는 양자 티베리우스를 정식입적 후 공동황제로 승격시킨 뒤에야 자신이 만든 이 영묘에 묻혔다. 아우구스트 사망 이후에도 많은 황제들과 그의 가족들이 차례로 안장되었다.
4. 파괴
전승된 이야기들에 따르면 해당 영묘 역시 410년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했을 때, 이 영묘 역시 도굴이 되면서 항아리들은 내부 장식품들과 함께 약탈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해당 영묘도 항아리 관석들만 남아 있다고 알려졌고, 황제와 황족들의 유골함이 훼손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졌다.
영묘는 중세를 거치면서 요새로 전용되어 크게 훼손되었고, 교회와 영주 등이 영묘를 장식한 대리석 조각을 건축 자재로 이용해 뼈대만 남은 상태인데다, 농민과 전문 도굴꾼, 유지, 교회 등이 영묘 안치자들의 유골을 담은 납골 항아리 등을 노리고 조직적 차원에서 도굴을 하였다.
더군다나 19세기에는 투우장, 공연장으로 쓰인 까닭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당시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를 정리하고 복원했다고 해도 완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설상가상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로마 시내 불량배들의 장소로 이용되어 우범 장소가 되고 무단으로 쓰레기가 투기되는 등 훼손이 심각했다. 따라서 영묘 훼손은 다른 로마 시대 유적과 비교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졌고, 관리가 허술해 2007년부터 2021년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 후 영묘만 우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2022년부터는 다시 보수 공사에 들어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