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항암 치료 후 사망까지 미국은 여섯 달, 한국은 한 달 걸립니다. 우리나라에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다가 마지막은 제대로 준비조차 못 한 채 죽어요. 죽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과연 최선인지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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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대학입시도 중.고 6년을 준비하고 결혼도 몇 달은 준비하는데 죽음은 유독 아무 준비 없이 맞는다. 죽음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문화 속에서 ‘죽음의 질’이 엉망이 되는 거다.
좀 오래된 연구이긴 하지만 영국 싱크탱크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80개 나라를 대상으로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 Index)’을 조사한 적 있다. ‘잘 죽는’ 순위로 영국이 1위, 대만 6위, 일본 14위, 한국은 18위에 올라 있다. 한국에서는 90% 이상이 병원에서 팔에 링거를 꽂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침대 위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그런데 한국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해 보면 90%는 연명치료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가족들과 생을 마감하기를 희망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준비 없이 맞으면 갈피를 잃고 허둥대다 결국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반면, 미리 차분하게 준비하면 당황하지 않고 준비한 대로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고 또 돌발변수가 생기더라도 침착하게 기준과 원칙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인간의 미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해 가족,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여기엔 어른들께 본인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면 불효라고 생각하며 불경스럽게 여기는 유교사상도 한몫 한다. 또 죽음에 대한 대화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마찬가지로 재난이나 전쟁 상황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재난과 전쟁에 대한 대화를 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속수무책이 된다. 두려울수록 더욱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이란 생명활동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생물학적 종말을 말한다. 죽음은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자연스럽다. 만약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고 되돌아와 그 세상을 설명해 줄 수 있다거나 체험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불안감이 줄어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방향을 달리 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미래학적 접근이다. 우리가 미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발생 가능한 미래의 일들을 예측해 보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를 대비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미래를 인간이 대처 가능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원하는 방식 대로 죽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5년 전 스위스 바젤에서 안락사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마지막 악장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일은 이례적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너무 오래 산 것을 후회하고 앞으로의 삶이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사람은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성 훼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통 없이 죽는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안락사는 구달 박사의 경우처럼 자의적이며 적극적인 죽음을 말한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독극물을 주입함으로써 고통 없이 품위 있게 죽는 것이다. 이건 연명의료를 하지 않고 자연사하는 존엄사와는 다르다. 우리는 2018년 2월부터 존엄사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선 의사들의 책임의식과 가족들의 열망 등이 부딪치며 보완해야 할 점이 많지만 그래도 이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의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현실에 선택의 폭이 한 가지 더 열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안락사나 존엄사를 권하는 게 절대 아님을 확실히 밝힌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는 것이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꽉 채워 살아가면 죽음도 긍정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살다가 사는 게 괴로워지면, 특히 가족이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면 그 전에 품위를 잃지 않고 존엄을 지키며 죽는 방법과 시기 정도는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거다.
최근엔 ‘조력존엄사’ 법안이 발의되고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인데 여전히 찬반 논란이 거세다. 예를 들어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한번 링거를 꽂든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면 제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참한 식물인간 상태로 몇 달 심지어 해를 넘기면서 고통스럽다는 표현조차 하지 못한 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가 죽어야 했다. 하지만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나서 조금은 유연해졌다. 연명의료 중단도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어쨌든 죽음도 미리 준비하면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