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천고일제(千古一帝 :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황제)의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하지만 잔혹을 일삼은 폭군으로 불리기도 하여 공과(功過)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가 행한 폭정 중 대표적인 것이 황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현세와 내세를 위해 연 800만 명을 동원하여 많은 토목사업을 일으킴으로써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고혈을 짜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사들이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적인 건축물들을 남김으로써 대대손손에게 먹거리를 제공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장벽인 만리장성,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으로 추정되는 진시황릉(황릉을 지키는 병마용갱 포함),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궁궐 중 하나로 꼽히는 아방궁이 바로 그것들이다.
1. 만리장성(萬里長城)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의 하나로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된 장성이다. 전국시대 북방에 위치한 초, 연, 제에 의해 부분적으로 건설했던 것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이를 연결하여 만리장성의 틀을 잡았으며 이후 계속 확장되어 명나라 때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총 길이가 6,000km에 달해 엄격히 말하면 만리장성이 아니라 ‘일만오천리 장성’이다. 그 거대함 때문에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알려졌었으나 2004년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만리장성의 굽은 커브를 전부 펴면 그 길이는 무려 한반도를 감싸고도 남으며,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장성이 길어 병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 목적인 북방민족의 침략억제 효과는 한계가 있었다. 즉,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보다는 북방민족과의 경계 구축이 만리장성의 주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은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야산에 위치하여 있다. 13세에 진나라 왕으로 등극(기원전 246년)한 직후부터 공사를 시작해 자신의 사후 1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높이 76m, 외성 둘레 6.3km, 내성 둘레 2.5km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이다. 도굴 방지를 위해 공사에 임한 수많은 작업자와 비빈, 장인이 생매장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무덤이 크고 두꺼울 뿐 아니라 다량의 수은이 매장되어 있는 등 접근성이 어려워 전혀 도굴이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발굴 시 많은 부장품이 발견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보물의 훼손방지를 위해 완벽한 발굴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발굴을 보류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주장하는 사람들로 있는 만큼 발굴이 완료되면 이보다 더 높은 평가도 받을 수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지하수를 세 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궁전과 누각을 세웠고, 천장에는 하늘의 별과 달의 천문도를 보석으로 장식했으며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를 재현하였다.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도록 했다. 수은으로 된 강과 바다를 만들고, 인어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능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전하고 있다.
3. 병마용갱(兵馬俑坑)
세계 8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평가 받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은 ‘말과 군사의 인형을 묻어둔 구덩이’란 뜻으로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진 유적지이다. 묻혀진 위치로 보아 사후 진시황을 모실 호위 군사집단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진시황릉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의 토용(土俑 :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한 4개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다고 추정하며,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각 토용들은 마치 실물처럼 정교할 뿐 아니라 모양과 표정까지 모두 달라, 각각의 실물들과 똑 같이 빚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토용의 피부는 실제 병사처럼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발굴되어 공기와 접촉되자 현재의 회색으로 변화되었다.
4. 아방궁(阿房宮)
아방궁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짓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궁궐로 공사도중 반란군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3개월 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방은 함양궁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는데 공사 중에 임시로 이 지명을 붙여 아방궁이라고 불렀고 결국 미완성 상태에서 끝나 정식 이름은 지어지지도 못했다. 크고 사치스러운 건축물의 대명사인 아방궁은 궁전 위에 10,00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900여개의 방을 보유했다. 아방궁에 회랑(回廊)을 짓고, 이곳에서 가교(架橋)를 세워 남산으로 직행할 수 있도록 했고, 거기서 강(위수 : 渭水)을 건너 함양(咸陽)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건축에 동원된 인력 수는 70여 만에 달했으며 부지 확보를 위해 민가 80,000여 호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기존의 비빈 궁과 별도로 자신이 정복했던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별도의 궁전을 만든 후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이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