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2021년 영화 《자산어보》는 알려진 대로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 얘기입니다. 정조가 죽고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그곳에서 창대라는 젊은 어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최고 유학자인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대신 평생 물고기를 잡으며 바닷속 지식을 방대하게 축적한 창대로부터 바다 생물에 대해 배웁니다. 그 결과물이 《자산어보》로 당시로선 매우 획기적인 어류도감이 탄생한 것입니다. 나이, 신분, 학력이라는 높고 견고한 장벽을 넘어서 이뤄낸 성과입니다.
“나이 들면 바둑에 필수인 순발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나는 늙었고 내가 하수다. 두 점을 놓아야 하는 하수가 됐으니 선후배를 떠나서 고수에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후배에게 배우는 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한국 바둑계의 거목인 서봉수가 한 매체와 인터뷰 때 했던 말입니다. 갈수록 어렵고 모르는 것투성이라며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의 노년은 공부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은퇴는 점점 빨라지는 추세이고 은퇴 후 여생은 점점 길어집니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는 초고령사회에서 많은 사람에게 곤혹스러운 과제입니다.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현역시절에 간직했던 열정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길은 새롭게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정약전과 서봉수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낍니다. 까마득한 후학으로부터 기꺼이 배우겠다는 겸허함으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길어지는 수명은 점점 더 넓은 범위의 세대와 다양한 네트워킹의 기회를 열어줍니다. 경계를 유연하게 가로지르면서 이뤄지는 배움과 협업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도 합니다. 그 만남은 또한 각자의 인생에 반짝이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정3품 퇴계 이황은 아들뻘인 종9품의 말단 기대승과 나이와 지위를 떠나 10년 넘게 서로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핵심은 지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하려는 열정이 있는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