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아흔 해를 사셨으니 보는 이에 따라선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겐 이보다 서운하고 애통한 일이 없다. 장례식장의 친구의 빈소를 찾아가다 어떤 빈소 앞을 지나는데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꼬마가 이렇게 묻는 걸 들었다.
“아빠, 장례식은 왜 3일 동안 해요?”
그 젊은 아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못 듣고 지나쳤지만 나는 그 뒷얘기를 내 나름대로 이어가 본다.
“응, 그건 시간을 두고 슬픔을 나누는 거란다.”
“왜 시간을 두냐고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더 많아지는 거잖아요?”
“슬픔이 너무 커서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맞으면 당한 사람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서 시간을 쪼개서 조금씩 나누는 걸 마음으로 표현하는 거야. 슬픔이라는 건 실제로 있는 거라서 한번 생기면 잘 없어지질 않아. 그래서 나누면 두 조각이 되고, 또 나누면 네 쪽이 되고 그렇게 계속 나누다 보면 작아져서 어느 정도가 되면 이제 가지고 있을 만해지거든.”
장례식장과 화장장에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살다 보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있어도 시간 앞에선 장사가 없고 고통 또한 영원하지 않다. 시간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고통의 시간도 어느덧 끝나 있음을 알게 된다.
고통을 견딘 인고의 시간만큼이나 세상을 살아내는 내공도 쌓인다. 다음에 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단단해진 내공으로 우리는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세상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다. 세상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예로, 연애의 끝은 이별 아니면 결혼이다. 헤어짐의 끝은 새로운 만남이고 결혼의 끝은 이혼 아니면 사별이다. 그렇게 보면 헤어진 연인은 새로운 만남을 이어준 사람이고 평생의 반려자인 배우자는 언젠가는 헤어질 사람으로 인식된다. 끝은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며 새롭게 보게 해주는 힘이 있다.
바티칸대법원 변호사이면서 카톨릭 사제인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에서 읽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 교구청에 있는 성직자 묘지 문 입구 양쪽에 새겨진 문장인데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매 순간 기억하면서 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사실 만큼은 절대적이다. 오늘은 내가 죽음을 향해 가지만 다음엔 너의 차례라는 걸 통해 우리는 생사의 반복과 이어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분의 유지를 마음 속에 받들며 그분 몫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산다면 그분은 돌아가신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삶이 되고 우리 생과 사는 반복되고 이어진다. 세상 모든 일에는 끝이 있지만 끝의 자락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 삶의 끝은 죽음이고 죽음의 끝은 삶이다. 그저 새로운 전환점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