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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건축기행

노이슈반슈타인성

서영복 객원 기자 입력 2025.09.09 11:02 수정 2025.09.11 14:57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독일 바이에른주 퓌센 근교에 위치한 동화 같은 성으로, 중세 전설과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아 1869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가 지었다.
이 성은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며, 내부는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화 등 근대적 편의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성의 이름은 ‘새로운 백조의 돌’을 의미하며,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호엔슈방가우 성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
.


대부분 중세에 지어진 다른 유럽의 성들과는 달리 노이슈반슈타인성은 19세기 중후반에 지어진 성으로, 이 시대에 성은 군사적인 가치를 거의 상실했기 때문에 군사적인 목적은 아예 없고 당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인 로엔그린에 푹 빠졌기에 취미로 지은 관저 목적의 성이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지어진 시기는 이미 증기선이 발명되고 독일 전역에 철도가 깔린 지 수십 년 뒤였다.

18세기부터 많은 성들이 저택으로 개조되어 그 목적이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보통의 궁전과 달리 가파른 산 중턱에 건설되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성을 지을 때 들어간 경비는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반대파였던 루트비히 2세로 하여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승전 이후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에 찬성해달라는 조건으로 뇌물조로 통째로 넘겨준 하노버 왕실 금고의 금으로 충당했다.
 

사실 루트비히 2세는 이 성 외에도 젊은 시절부터 많은 건축에 매달렸고, 생전에 성을 총 다섯 채 건축하려 했다. 린더호프성은 완공했고 노이슈반슈타인성은 1/3만 완성했으며 헤렌킴제성은 절반만 완성하는 데 그쳤다. 나머지 비잔틴/오리엔탈 양식 성은 계획만 세우고 착공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건축비는 620만 독일 금 마르크, 2021년 가치로 4700만 유로(약 721억 2682만 원)에 달했는데, 건축비 지출 때문에 갈등을 많이 겪었다. 루트비히 2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바그너가 오페라를 쓰면 그것을 모티브로 궁전 등을 건축했는데, 당연하게도 재정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바그너가 조정에서 축출당했을 정도. 바그너는 안 그래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바이에른 국왕과 절친한 사이임에도 공화주의에 민족주의 성향이라서 왕실 사람들에게 그는 눈엣가시였다.


이에 상심에 빠진 루트비히가 마지막으로 광적으로 매진한 사업이 건축이었고, 개인적으로 절대왕정을 동경하던 루트비히 2세의 바람이 강하게 깃들었다. 그는 자신이 관심 있던 중세, 근대의 양식을 한층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발전시켰고 모든 구성요소를 스스로 고안했다. 장식과 가구 등은 다른 시대의 물건 등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당대의 물건을 일종의 재현 혹은 발전시킨 것. 일례로 옥좌가 놓일 예정이었던 알현실은 비잔틴 양식을 발전시킨 형태로 지었다.


그렇게 애정을 가진 성이지만 루트비히 2세 생전에 완공되지 못했으며, 국왕 본인도 이 성에서 2주 밖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완성되기 전에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 강제로 퇴위해야 했으며, 그로부터 3일 후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 2세 사후에 본래 계획의 1/3 정도로 축소해서 현재의 성을 완공했다. 덧붙여 루트비히 2세는 이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사망하면 같이 철거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루트비히는 사망하기 몇 년전부터 이 성을 건립한 것을 후회하는 말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루트비히가 사망하고 6주 뒤부터 관광지로 개방되었다. 생전에는 재정 낭비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다른 성들과 함께 관광지로 각광받아 지금까지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매년 13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여름에는 하루에 6천 명이나 찾아오는, 바이에른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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