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 엔딩코디네이터

어디까지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가?

신형범 기자 입력 2026.03.10 09:52 수정 2026.03.10 09:52

지난 2월 9일 인천공항, 한 60대 남자가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남자는 중증 폐섬유증 환자로 폐가 점점 굳어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을 끝내기 위해 조력자살을 도와주는 스위스 디그니타스와 계속 접촉해왔다. 회복가능성이 없고 자발적 선택임을 확인하고 비용도 수천 만원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의 동의는 얻지 못했다. 뒤늦게 유서를 발견한 가족들이 경찰에 연락하고 경찰은 이륙 15분 전에 비행기를 세워 남자를 설득해 가족에게 돌려보냈다는 게 기사의 내용이다.

 
구출작전 내지 미담처럼 쓴 기사만으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으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가난으로 고통받든, 장애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든,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질병의 고통 속에 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사는 게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자살 혹은 조력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한다. 조력자살은 자살이자 죄악이라고. 

 

종교도 삶의 가치를 설교한다. 인생을 스스로 버리는 건 자유가 아니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그러자 그가 묻는다. “자유가 없는 생이 과연 삶인가요? 없는 죄도 만들어서 산 채로 화형까지 시켰던 종교가 자유의지로 죽겠다는 선택을 왜 못하게 하나요?”라고.

 
그러자 스스로 선택한 조력 존엄사와 자살은 다른 건가 의문이 생긴다. 머리속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가, 사랑이란 숨이 붙어 있는 한 곁에 묶어두는 집착인가 아니면 그가 원하는 먼 길을 기꺼이 배웅하는 용기인가, 당사자의 절망을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명은 고귀하다는 명제로 그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가.

 
세상은 개인의 가치판단을 어디까지 존중해야 할까, 죽음의 자유까지 허용해도 괜찮은가? 비행기에 올랐던 남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생의 연장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죽을 수 있는 자유다. 그러나 조력 존엄사를 인정하는 스위스와 달리 우리나라의 법은 그가 계속 살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안락사를 돕는 행위는 살인이라고, 법이 그렇다고 규정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내린 개인의 결단을 국가와 법이 막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삶을 소중히 여긴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라 현재를 단단히 붙들어주는 생명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말하지만 결국 주목하는 건 삶이다. 그러나 죽음을 말하면서도 인간답게 사는 법은 끝내 내놓지 않는다. 살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살아야 하고 또 도와야 하지만 나의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죽음 역시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해 있다고 믿는 쪽이다. ^^*



저작권자 ㈜한국집합건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